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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 in 상하이] 서른여섯, 11년째 '나'다운 상하이를 살고 있습니다

[2023-11-04, 07:43:55] 상하이저널
중국에 온 지 햇수로 어언 13년 차, 상하이 생활 11년 차가 되었다. 홍췐루 교민분들께는 명함도 못 내미는 귀여운 숫자이자, 비교적 뉴페이스들은 대단히 놀래는 연수. 이 정도 시간이 흐르니, 이제 나를 부르는 메이뉘(美女)란 호칭을 착각 없이 듣고, 소수점 뒷자리는 무조건 깎을 수 있는 정도의 넉살이 생겼으며, 길을 물어보는 중국인에게 최단거리길로 안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 오랜 인연들과 연락이 닿으면 다들 내가 아직도 상하이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상하이 지박령이 되려 그러냐며, 상하이가 그렇게 좋냐며. 

운명과 기질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이라 했던가. 친구들 말처럼 내가 아직 상하이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단지 학교와 직장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애정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유난히도 어려워하는 내 성향의 문제도 있겠다. 이 순간에도 상하이의 이 가을바람을, 고즈넉한 아침 동네 산책 풍경을, 밤낮으로 우아한 플라타너스 자전거 길을 더 이상 일상으로 마주할 수 없는 그때를 상상하면 금방 섭섭함이 밀려온다. 


이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홀린 듯 지내며 10년 세월을 보냈다. 5년 전 함께 살던 룸메는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고, 같이 공부하던 친구는 최근 승진을 하고 조그만 집을 장만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일찌감치 한국에 돌아갔던 친구들은 멋지게 자차를 모는 커리어우먼이 되어있고, 또 워킹맘으로 제 몫을 다하며 살고 있어 보인다. 현타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직도 6년 전 한국인 선배에게 물려받은 월셋집에 살며, 월 16원짜리 공유 자전거를 최애 이동 수단으로 하고 있는 나의 이 현실. 아직 신랑은커녕 남자친구도 없는데, 설상가상 최근 흰머리도 몇 가닥씩 보이고, 눈 밑 주름도 꽤 깊어진 듯하다.

나 이 속도로 여기서 괜찮은 걸까? 언제나 남들보다 한 템포씩 늦었던 나는 친구들이 직장을 다닐 때 학교에 입학했고,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들려올 때 쯤 취업을 했다. 한국 또래 친구들의 타임라인에서 조금씩 어긋난 삶을 살며 늘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상하이에서의 생활은 자유롭고 편안했다.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곁을 내어준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상하이에 온 이후로 나는 여러 통념에서 무척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특히 물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체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는데, 난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라 부르고 가족들은 이런 나를 짠순이라고 부른다. 단적인 예로, 나는 옷을 잘 사지 않는다. 지금 옷장을 가득 채운 옷들과 가끔 상하이를 떠나는 친구, 언니들이 정리하는 옷을 물려받는 것으로도 차고 넘쳤다. 사실 이런 나도 한때는 대단히 깔롱(‘한껏 멋부리다’라는 부산 사투리) 부리던 아이였는데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은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멋에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아마도 나의 멋부림은 타인을 향해 있었나 보다. 돌이켜보면 이런 성향을 가지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준 책들이 있다. 그 중 오프라 윈프리 자서전에서 읽은 돈에 관한 문구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는데 그 내용이 이러하다. 

“당신이 돈을 쓰는 방식이 당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의 당신에 대한 진실과 같은 선상에 있길 바란다. 당신의 돈이,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돈은 당신이 지닌 좋은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잘 사용되기를 바란다.”

이 구절을 마음에 새긴 지 한참 만에 나는 나다운 방식으로 그녀의 조언을 따랐다. 올해 여름, 나는 8년간 모은 통장을 탈탈 털어 엄마와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인생의 커다란 한 장을 마무리하는 엄마에게 헌정 여행을 선물하고 싶었다. 2달간 대부분의 일정을 당일에 정하는 찐 자유여행. 엄마와 나는 현실판 부루마불의 주인공이 되어 13개국 28개 도시를 무사히 다녀왔다. 어느 새벽, 스위스행 침대칸 열차에서 아름다운 창밖 풍경에 감동하며 ‘딸, 이 빚을 다 어떻게 갚을꼬. 죽어서도 내가 잘 돌봐줄게’하고 농담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억만금을 준대도 바꾸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상하이 생활 11년 차. 나는 이곳에서 느리지만 꽤 풍요로운 30대를 보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내 것으로 혼동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소한 만족감들로 나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가끔 불안해하는 내 마음에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각도가 중요한거라고 위로하고 싶다. 남들보다 늦은 속도로 살게 된 김에 각도를 넓혀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밀도 있게 누려보자고.

나를 포함하여, 상하이에는 저마다의 속도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그녀들이 있다. 조금 별나 보이는 그녀들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사람들. 안정에 쉽게 삶을 걸지 않은 그녀들이 마음속 닿고자 한 그곳까지 온전히 다다르길 응원한다. 타국에서 가끔 무리의 따뜻함이 필요할 때 함께할 수 있는 소박하고 친절한 이들이 곁에 있길 기원한다. 

상상(sangsang.story@outl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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