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을 때가 있다. 안개와 같은 미로 속에서 방황할 때가 있다. 막막한 그럴 때, 종종 과거를 회상하며 그간의 기억을 불러온다. 잠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을 때, 암막을 들춰내는 실마리가 보인다.
우리는 항상 과거를 회고하며 오늘날을 대비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를 빗대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 앞에 답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습성일 것이다. 이는 한 개인도, 한 사회도, 한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마주한 한국인, 한국 사회 역시 중국의 과거를 통해 현재의 중국을 주시할 수 있다. 늘 상 마주하는 거리의 중국인들, 학교, 직장 내의 중국인 통쉐(同学),통쓰(同事)들 모두 과거의 사건이 축적되어 오늘날 이 자리에 우리와 대면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그들을 더 잘 알기 위해 그들의 역사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지내는 이곳 난징은 100년 전 중국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던 도시다.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조각했다.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사는 코끼리, 중국의 과거를 담은 도시 난징을 둘러보았다.
중국의 국부 쑨원이 잠든 곳, 중산릉
중국에는 ‘난징에서 중산릉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천 년 왕조 시대를 종식한 쑨원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산릉은 난징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방문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부속 관광지를 제외한 중산릉만 방문한다면 무료이므로 더욱 편하다. 산길을 따라 약 20분 정도 미니버스를 타고 오르면 중산릉 입구에 다다른다. 입구부터 많은 인파가 몰려 있어 쑨원의 중국 내 입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까지 느끼지 못했지만, 산 아래서 중산릉을 올려다봤을 때 크기에 압도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 하면 역시나 스케일이지만, 오랜 유학 생활에도 이들의 크기가 익숙하지 않을 때가 있다.
[사진=중산풍경명승구 관람도. 중국 명승지 중 최고등급인 5A급]
중산릉에 들어서면 꼭 거쳐야 하는 문부터 범상치 않았다. 능 문에는 박애(博爱)라고 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박애주의를 모토로 공화정을 쟁취한 프랑스 혁명이 떠올랐다. 아마 평생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분투한 쑨원의 의지를 단번에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사진=중산릉 능문 '박애'라고 적힌 석판]
능 문을 거치고 긴 길을 걸었다. 약간의 경사가 있었지만, 양 옆으로 나무가 우거져 숲길을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길을 걷고 약간의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중문이 나왔다. 역시 글귀가 적혀있었다. 천하위공(天下为公). ‘천하를 공민을 위해’라는 뜻이다. 어디서 많이 본 글귀이다 싶더니, 필자가 다니는 난징대 정치학과 건물에도 똑같은 글귀의 비석이 놓인 것이 떠올랐다. 100년 전 쑨원의 지침을 현대의 젊은 대학생들에게도 전달하려는 의지가 적잖이 인상적이다. 중문 뒤편에는 거대한 비석이 있다. 역시 쑨원을 기리는 비석이다.
[사진=중산릉으로 가는 길. 양 옆으로 숲이 우거져 있다.]
[사진=중산릉 중반에 나오는 중문. ‘천하위공’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진=쑨원을 기리는 거대한 비석. 중화민국 18년, 즉 1929년 세워진 듯 하다.]
다시 비석을 지나면 높다란 경사의 계단과 마주하게 된다. 쑨원의 묘소까지 총 392개의 계단이 존재한다. 이는 쑨원의 죽음 직후 당시 중국의 인구수 3억 9천2백만 명을 의미한다. 역시 중국은 과거에도 사람이 많았다.
[사진=중산릉의 392개 계단은 당시 중국 인구 수 3억 9200만 명을 의미한다.]
높은 계단을 힘겹게 오르다 보면 좌우로 커다란 쇠솥이 보인다. 그중 서편에 위치한 솥에는 커다란 구멍 2개가 있다.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포탄에 맞은 흔적이라고 한다. 옛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10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사진=동서 양쪽에 놓은 거대한 쇠솥. 1929년 중화민국 상하이특별시정부가 기증]
그렇게 정상에 다다르면 쑨원을 기리는 제당에 도착한다. 제당에는 민족, 민국, 민권이라는 세 글귀가 걸려있다. 쑨원이 제창하고 지금도 대만에서는 구호로 쓰이는 삼민주의의 세 요소다. 공화국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당시, 쑨원의 의식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그 위에는 천지정기(天地正气)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온 중국 천지의 바른 기운이 이곳에 집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당 내부는 아쉽게도 사진 촬영 금지였다. 또한 외부에서 제당으로 들어갈 때도 긴 경로를 빙 둘러서 가야 했다. 입장하는 줄이 길 경우를 대비해서도 있겠지만 아마도 쑨원을 참배하기 전까지 마음을 바로잡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의미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당 내부는 경비원의 감시하에 관람할 수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쑨원 동상이 있었다. 프랑스 조각가 폴 랑도스키가 조각한 것이다. 제당 동서 양쪽 벽에는 쑨원이 작성한 <건국대강>의 전문이 조각되어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려있다. 아마 중국 내 이 깃발이 걸려있는 곳은 역사 관련 유적지뿐일 것이다.
[사진=중산릉 제당. 건물 지하에 쑨원의 관이 있다.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제당 내부를 한바퀴 돌고 나오면 올라올 때 보이지 않았던 난징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392개의 계단을 오르고 광활한 풍경을 감상하니 상쾌했다. 작은 산을 오른 기분이었다.
中山陵园
南京市玄武区石象路钟山风景名胜区
중국 100년의 역사를 지켜본 총통부
난징은 기원후 3세기, 손권이 오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 6개의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다. 또한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 홍수전이 궁전을 세우기도 했고 장제스의 국민당이 터를 잡은 곳이다. 그야말로 중국 역사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총통부 정문]
난징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총통부는 이러한 격랑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지다. 총통부는 명나라 초기 존재했던 황궁 터에 세워졌다. 명 청 왕조 시기에는 장쑤성, 안후이성, 장시성 세 개의 성을 총괄했던 양강(两江) 총독의 집무실로 이용되기도 했다. 청 말,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은 하늘의 궁전이라는 의미의 천궁을 짓기도 했다. 지금도 총통부 내부에는 태평천국 운동 당시 홍수전이 이용했던 왕좌를 볼 수 있다. 금으로 치장한 왕좌를 보고 있으면 당시 태평천국 세력의 위력이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난징 총통부 입구 초입에 걸려있는 삽화. 청 왕조 시기 양강 총독]
[사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사진=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
[사진=2차 국공합작을 위해 협상하는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사진=1949년 국공내전 승리 후 난징 총통부에 입성하는 공산군 사령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덩샤오핑]
[사진=태평천국 당시 홍수전이 앉았던 옥좌
[사진=태평천국 당시 예복.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쑨원은 신해혁명 이후 임시대총통이 되어 이곳에 집무실을 두었다. 1927년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이곳에 본부를 세우고 북벌을 시작했다. 총통부에 들어서면 장제스와 당시 국민당 주요 인사들이 지내던 곳을 잘 관람할 수 있다. 주요 손님을 맞이하는 회객실(会客室) 한쪽 벽에는 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지만홍 깃발과 쑨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실내의 고급스러운 가구와 배치되어 묘한 분위기를 더했다. 회객실 내 밀랍 인형은 너무나 생생해 그 시대의 인물들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고전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사진=왼쪽부터 장제스, 쑨원의 아들 쑨커의 부인 천슈잉, 장제스의 부인 송메이링, 리중런의 부인 궈더졔, 중화민국 부총통 리중런]
총통부는 전체적으로 동서양 양식이 어우러지게 지어졌다. 당시 파도처럼 밀려오던 서양 문물과 기존 전통 방식이 혼합된 근대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덕수궁이 떠올랐다.
[사진=동서양의 문양이 혼합된 총통부의 건축 양식]
[사진=서양식 전등이 설치된 장제스의 집무실]
총통 집무실을 관람하고 나오면 아름다운 중국식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배를 형상화한 정자와 잉어가 헤엄쳐 노는 연못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마침 비 온 뒤의 선선한 가을 공기가 난징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사진=총통부 서편의 정원, 멀리 난징의 마천루와 어우러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总统府景区
南京市玄武区长江路292号
민초들의 비극이 담긴 난징대학살 기념관
필자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여러 번 다녀왔다. 이곳은 다녀올 때마다 감정이 격화되는 곳이다. 기념관을 방문하면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 매번 놀라곤 한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매우 넓은 부지에 지어졌다. 입장 후 가장 먼저 당시 주민들의 모습을 묘사한 동상을 볼 수 있다. 학살에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모습은 마음 한편을 항상 먹먹하게 한다.
[사진=일본군 폭격기에 의해 아이를 잃은 부모의 울부짖음]
기념관 내부에는 유독 자주 등장하는 숫자가 있다. 바로 삼십만이다. 당시 일본군의 학살로 약 삼십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웬만한 한국 중소도시 인구수이다. 내부에는 중국 국내외 인사들이 생생히 기록한 사진과 증언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1937년 12월, 중국 북부와 상하이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난징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난징을 지키던 국민당군은 소수 병력만을 남겨놓은 채 피신했다. 난징 성 내에는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만이 남겨져 있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마침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하고 자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된 것은 다름아닌 ‘살인 콘테스트’ 였다.
[사진=“100인 베기 초기록, 무카이 106 – 노다 105” 당시 일본군의 목 베기 대회를 보도한 기사]
일본군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난징 주민들을 사살했다. 폭행과 강간, 강도 등 수많은 비인격적 행위가 동반되었다. 차마 지문에 실을 수 없는 증언과 사진들이 기념관 내부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 인간 본성의 선악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이곳에서만큼은 성악설을 굳게 믿게 된다.
기념관 내부를 관람하다 보면 사진 촬영을 엄격히 통제하는 구간이 나온다. 바로 학살 당시 희생된 시신의 유골이 그대로 보관된 장소다. 보안관들이 사진을 찍으려는 관람객을 엄격하게 경고하며 제지했다. 아마 망자에 대한 예를 갖추려는 의도일 것이다. 처참한 광경을 눈으로 목도하다 보니 마음이 어느새 지쳐갔다. 나와 마찬가지로 관내 많은 관람객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사진=학살과 강제 노역을 위해 끌려가는 젊은 남성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관객들에게 일정한 메시지를 보낸다. 바로 역사를 그대로 직시하되 증오는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전시장 내부의 설명은 세 가지 언어로 쓰여있다.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다. 혹여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 주기 위함이다.
[사진=2000년 2월, 난징대학살기념관을 방문해 사죄하는 중일전쟁 참전병 시로 아즈마]
찬란했던 도시, 그래서 혼란과 아픔을 간직한 도시 난징
오늘날 난징은 인구 약 850만의 대도시이다. 비록 과거 수도의 지위를 잃고 그 위상이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중국 화동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또한 혼란했던 중국 근대사를 오롯이 떠안은 비운의 도시다. 만약 당신이 오늘날 중국 사회를 빚은 역사를 알고 싶다면 난징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난징 시내 곳곳의 유적지를 돌아보면 혼란한 당시 시대상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져 가는 요즘, 난징으로 역사 산책을 떠나보길 추천한다.
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
南京市建邺区水西门大街418号
그 밖의 여행지
난징 이제항위안소 유적진열관
[사진 출처=바이두 바이커 백과사전]
일본군 침략 당시 젊은 여성들을 성노예로 붙잡아 성범죄를 일으킨 곳이다. 난징 총통부 남쪽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에 역사적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
난징 1912 거리
[사진=난징 1912 거리]
총통부 출구와 1분 거리에 바로 붙어 있는 난징 최대의 유흥 거리이다. 1912는 쑨원이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해혁명을 일으킨 연도이다. 과거 총통부의 뒷골목이었던 이곳은 오늘날 고급 음식점과 유흥주점이 들어선 화려한 밤의 거리가 되었다. 오늘날 젊은 난징을 구경하고 싶다면 약간의 취기와 함께 들르기를 추천한다.
[사진=명효릉(출처: Meipian)]
최하층에서 시작해 명 왕조를 세운 주원장의 무덤이다. 귀여운 코끼리 석상이 유명하다. 특히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 관광객을 유혹하는 명소이다. 중산릉의 서편에 위치해 있고 중산풍경구에 부속된 유적지이므로 두 유적지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학생기자 최장현 (난징대 국제정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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