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한족 동네를 지날 때면 짓궂은 한족 아이들이 긴 나무 막대기로 길을 막고 못 지나가게 괴롭히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 아이들이 “고려봉자(高丽棒子)”라고 욕을 했다. 그 말이 그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기분 나빴으니 당연히 욕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런 이상한 호칭으로 불리는 우리는 얘네랑 좀 다른 사람이구나 알게 되었다.
대학교 때에도 다수에 속하지 않은 소수민족이란 신분 덕에 다양한 상황을 경험했다.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릴 무렵에는 소수민족 대학생으로, 한복을 입고 천안문 앞에 위치한 인민대회당에서 그 대표들을 마중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화려한 전통의상으로 행사장을 꾸미는 화병 같은 역할이었음을.
그 후 한국서 살 때도 역시 소수자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다. 불합리한 상황을 경험한 자의 넋두리 같은 건 아니다. 물론 드물게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언행도 있었지만 그런 일일수록 별로 대단치 않음을 나 또한 간파할 수 있었기에 상처가 되진 않았다.
얼마 전 상하이(구베이) 한인문화센터인 '리멤버'에서 <불하된 조선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재일조선인 후예인 오충공 감독의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충격이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로,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에 대한 대학살을 증언해 주는 많은 분의 절제된 언어 속에서도 화면에 표현이 되지 않은 끔찍한 만행이 상상이 갔다.
이 영화 관련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 주신 어떤 선생님은 식민 지배의 맥락으로 간토대지진 후의 조선인 대학살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이 만행은 다수자가 그 사회 소수자에 가해진 편견과 혐오와 이기심에서 비롯된 야만적인 학살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지배층은 자신의 통치 지위가 불안하게 느껴질 때면 항상 자신의 안정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 다수를 단합시킬 공공의 적을 만들어 내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런 지배층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고 집행한 이들은 사실 우리처럼 지극히 평범한 다수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에게 무자비한 행태의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인간 내면의 악이 어디까지일지 생각해 보았다.
한나 아렌트가 다뤘던 ‘평범한 악’이라는 주제가 떠올랐다. 악마는 결코 무서운 얼굴의 괴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처럼 평범한 모습의 보통 인간이었다. 르봉 또한 <군중심리학>에서 개인이 일단 군중의 하나가 될 때는 그 상황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으며 격정적, 맹신적, 파괴적 행동을 많이 하게 된다고 얘기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자신이 속한 무리에 들어야 안정감을 느끼고, 또 그 무리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역사상 모든 인재는 대부분 상층 이익집단과 이런 다수의 평범한 인간들이 같이 연출해 낸 인류 문명 파괴의 가장 처참한 현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우리가 다수가 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 같이 한 목소리를 낼 때, 뭔가 틀리지 않았을까? 뭔가 놓치지 않았을까 더욱 조심해야 하고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긴장해야 한다.
사실 남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지만, 출생지와 민족적 구분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인구적 소수자가 된 내 신분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소수에 속해 있어서 남에게 무의식적인 피해를 조금이라도 덜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변두리에 있기에 주류 사조와 고정관념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향한 관찰자의 시각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별 의미 없는 결론을 도출해 냈지만, 한순간 기분이 산뜻해졌다.
소이(mschina05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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