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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상하이 220]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2023-12-23, 06:36:46] 상하이저널
케네스 그레이엄(글),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그림)  |  시공주니어  |  2019
케네스 그레이엄(글),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그림) | 시공주니어 | 2019

The Wind in the Willows 

시작은 이도우 작가의 책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였다.
곰곰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거나 하진 않아. 다만 몇몇 장면이 잊히지가 않았어. 살면서 가끔 괴로울 때 그 책을 다시 읽는데 그냥 나한테는 그런 책이야” (P58)

그런 책들이 있었다. 십 대의 나, 이십 대의 나, 삼심 대의 내가 머리가 복잡해질 때, 이유 없이 슬플 때, 상대 없이 화가 날 때…… 무심코 책장에서 집어 들어서 아무 데나 넘겨 읽게 되는 <그냥 나한테는 그런 책들>. 40대에 들어선 나에게 이도우 작가의 책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가 그랬다. 책 속 책방 주인 은섭이가 말하는 <나한테는 그런 책,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언젠가 읽어야지... 하며 상하이로 보내는 짐에 실었다가 2022년 상하이에서의 첫 해를 힘들게 보내고 이제야 한숨 돌리며 읽었다.

책의 시작은 두더지 모울이 집안일을 하다가 솔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지겨워!”하고 소리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이 마음에 든다. 호기롭게 세상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아직 모든 게 겁이 나는 모울에게 물쥐 래트는 말한다.

“이봐 너 정말로 오늘 아침에 할 일이 없다면 우리 둘이 함께 강으로 나갈 수 있는데, 오늘 하루를 강에서 보내지 않을래?

모울과 래트가 노를 저으며 나누는 대화, 와일드 우드에 사는 오소리 배저 아저씨가 지친 손님을 대하는 모습들을 기분 좋게 읽게 된다.
배저 아저씨는 그런 데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식탁에 팔꿈치를 올려놓는 것도, 둘이서 동시에 떠들어 대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배저 아저씨는 식탁 한쪽 끝에 있는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두 동물의 이야기를 듣고 이따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어떤 얘기에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듯했고, “거봐, 내가 그랬잖아,” 라든가 “내가 말한 대로야.” 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이렇게 했어야지”라든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 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P88)

 책의 마지막 인물 두꺼비 토드의 이야기가 나오는 모든 장면들은 오소리 배저 아저씨와는 심히 다른 나의 심기를 건드린다. 모울, 래티, 배저 아저씨의 우정과 배려, 그들의 여정에서 나오는 주변 경관에 대한 그림 같은 묘사들에 포근해지다가도 책 속의 다른 세상 같은 사고뭉치 토드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넘겨 버릴까?’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다행히도 토드에 대한 짜증은 사라지고, 버드나무 숲 주변을 묘사하는 부분들, 두더지가 자신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의 독백, 꼬마 포틀리를 찾으러 갔을 때 래티가 듣는 숲의 노랫소리들이 잔잔히 남는다.

이 책이 작가 케네스 그레이엄이 시력이 약한 아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모아서 만든 책이라는 글을 읽고 나니, 작가의 아들과 두더지 모울이라는 캐릭터가 오버랩 되기도 한다. 사고뭉치 두꺼비 토드, 사려깊은 물쥐 래티, 겁이 많으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선한 두더지 모울, 이들 곁에서 때로는 혼내지만 사랑으로 묵묵히 돌봐주는 오소리 배저 아저씨는 그런 아들이 세상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책 속 주인공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서로를 참견하는 말들이 정겹고 참 귀하게 느껴진다. 

“이봐 너희 집을 찾으러 가는 거야, 그러니 너도 따라오는 게 좋을걸, 찾을 게 있으니 네 코가 필요해…정말이야, 밤새도록 바깥에서 헤맨다 해도 난 너희 집을 찾아갈 거야.
그러니 힘내, 친구야”
(P116. 래트가 집을 지나쳐버려 상심한 모울에게)

“래트, 난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서 잘 수가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무슨 일이든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배를 타고 강 위쪽으로 올라가 보자… 
어쨌든 침대에 누워서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P165. 꼬마 포틀리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모울이 래트에게)

“ 바로 토드의 시간이야! 토드의 시간이란 말이야! 내가 겨울을 나자마자 토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 오늘 바로 그 녀석 일을 시작하겠다…
너희 둘 다 당장 나를 따라서 토드홀로 가자. 토드 구출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 거야”
( P135. 배저 아저씨가 사고뭉치 토드를 고치기 위해 출동!)

은섭이가 말하던 ‘몇몇 장면’은 어디였을까, 나는 책 속 인물 중 누구를 가장 닮았을까.

 모울은 자기가 잘 알고 있고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울은 걸음을 옮기면서 자기가 들판과 관목 숲을 갈고, 고랑을 쟁기질하고, 목장을 쏘다니고, 저녁이면 좁은 길을 어슬렁거리고, 정원들 가꾸던 동물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떠올렸다. 그리고 무뚝뚝하고 고집스럽게 참을 줄 알고, 충동적인 게 자연의 본성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모울은 현명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자기 미래가 걸려있는 즐거운 곳을 지켜야만 했다. 모울은 그곳에서 충분한 모험을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삶을 펼쳐야 했다.
(P106.)
아.. 모울이었구나! 

변영아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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