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였다면 새롭게 시작하는 2020년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100주년으로 의의가 있는지 알아보자.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산둔자(三屯子) 전투에서 독립군에 패배한 일본은 간도에 있는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했다. 그리고 1920년 6월 7일, 대한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는 봉오동 골짜기에 군사를 배치하고 분대장 이화일을 시켜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도록 지시했다.
6월 7일 약 오후 1시, 일본군은 삼면 고지에 독립군이 매복된 봉오동 골짜기까지 들어왔고 그 순간, 홍범도의 발포 명령과 함께 독립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전투는 결국 대한 독립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측은 전사자 157명, 중상자 200명인 반면 독립군 피해는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불과했다.
청산리 대첩, 1920년 10월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이 보복전에 나서자 홍범도를 중심으로 연합부대는 새로운 독립기지를 찾기 위해 청산리 일대에 도착했다. 일본은 독립군에 대한 보복을 위해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켰다.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은 협력했고 청산리 골짜기의 지형물을 활용해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청산리 전투가 ‘대첩'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아군의 피해는 적고 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큰 승리였기 때문이다. 6일간 치열했던 전투 결과,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200명과 부상자 3300였던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 60명과 부상자 90명에 불과했다. 4700명의 병력을 가진 독립군이 3만 5000명의 병력을 가진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은 독립운동 역사의 자랑이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간행, 1920년 12월
한국 독립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언론인, 역사학자이자 교육자가 있다. 그는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독립운동가 박은식이다. 박은식은 1882년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고 결국 학문의 높은 경지에 올라 성리학자로서 이름을 알렸다. 1904년, 박은식은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지내며 언론인으로서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1907년 박은식은 양기탁, 안창호, 이회영을 비롯해 많은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창립한 ‘신간회’에 가입해 교육과 언론 분야에서 활동했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일본은 한국의 역사적 사료를 소각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역사를 그 국가의 국혼(国魂)이라고 여겼던 박은식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상실할까 걱정했다.
만주에 도착한 박은식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하이로 왔다. 상하이에 온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통해 일제의 침략을 강력히 비난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국혼을 강조하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자는 내용이 있었다. 박은식이 작성한 한국의 아픈 역사(通史)에 대한 이야기는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대량으로 보급됐다.
1920년 12월 간행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일제의 죄상을 자세히 밝히고 3.1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은 반드시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고 서술했다. 또한, 역사의 흐름으로 보아 일본 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으로서 민족성과 국혼을 강조한 박은식의 사학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0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읽어 보면 100년 전 한 역사학자 박은식이 인지했던 역사의 흐름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기자 박준용(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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