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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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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7월은 어떤 계절이었을까? 대한민국이 숨가쁘게 달려오지 않았던 날은 없었지만 7월 역시 찬란한 역사와 아픈 역사가 공존했던 한 달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7월 17일, 제헌절은 민주주의 국가로 향하는 첫 도약이라는 점에서 찬란한 역사였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7월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외세의 압력을 못 이겨 강제 퇴위 되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1907년 7월 19일,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이 일본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끝내 황제의 자리를 양보한 그 날에 대해 알아본다.
고종 양위 사건의 배경
1907년 4월 고종은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을사늑약이 황제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부당한 조약이라는 사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종은 을사늑약 무효 선언서를 작성하고 프랑스 대통령에게도 친서를 보내는 등 많은 노력을 했으나 당시 열강들은 대한제국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때, 각국 대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이준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자주권을 침해받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릴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이준은 김구와 함께 네덜란드까지의 이동 경비와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준은 고종의 뜻과 대한제국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고 헤이그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이 합류했고, 러시아 공사관 참사관 출신 이위종이 합류하면서 셋은 6월 19일, 독일 베를린에 도착해 베를린에서 대한제국의 주장문을 인쇄해 6월 28일, 일본을 제외한 각국 위원회에 보냈다.
그러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대한제국의 특사를 환영해주는 곳은 없었다. 러시아 대표는 특사들의 면회를 거절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표는 대한제국 지원을 거절한다. 7월 1일,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 장관을 찾아 면회를 요구하지만, 이 또한 거절당하고 말았다. 헤이그 특사의 존재를 알아버린 일본 정부의 방해로 특사들이 회의 참석과 발언을 할 수 없게 됐다.
고종 양위 사건
황제가 비밀리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이토 히로부미는 군인들을 동원해 궁궐을 침입해 대한제국 황실을 위협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를 통해 일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는 것보다 못하다”라며 이 사태에 대해서 황제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을사늑약을 위반한 행위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
이때,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을 중심으로 친일파는 고종의 퇴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파로 불리는 송병준은 “일본 천황에게 사죄하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밖에 없다"며 고종의 퇴위를 거듭 강요했다. 결국 퇴위와 순종에게 양위를 결단한 고종은 7월 19일 양위식을 거행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56세의 나이로 모든 황권을 내려놓게 됐다.
고종의 퇴위는 일본의 강압은 물론 친일파 세력에 의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다. 반민족 행위를 해여 일본 제국에 가담한 친일파로 인해 한국은 35년이라는 세월 동안 빛이 없는 암흑 속에 살아야 했다. 치욕적이고 아픈 역사일지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7월을 맞아, 대한제국의 황제가 특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강제 퇴위 되었던 사건과 헤이그 특사를 기억하며 미래의 한국에는 더 이상 아픈 역사가 없으면 한다.
학생기자 박준용(상해한국학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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